동명왕릉이 개건되기까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는 우리 나라 력사에 가장 강대하였던 고구려의 력사를 전하며 동명왕릉이 웅장하게 꾸려져있다.

   이 동명왕릉에도 천재적인 예지와 주체적인 안목으로 대국주의자들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외곡되고 복잡하게 얽혔던 반만년의 민족사를 옳바로 정립해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업적이 깃들어있다.

   원래 동명왕의 무덤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졸본성(오늘의 중국 료녕성 환인) 부근에 있었는데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이 무덤을 오늘날의 평양시 력포구역에 옮겨왔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을 강점한 외래침략자들은 고구려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을 도굴하고 귀중한 문화재를 략탈, 파괴하였다.

   그후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를 거쳐 이 왕릉이 명목상으로나마 간신히 유지되여왔으나 일제와 반동어용사가들은 동명왕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전통적인 숭앙심을 없애버리려고 엄연한 력사적사실들을 부인하였다. 일제는 동명왕은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나오는 《환상적인물》이며 동명왕릉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한편 주체30(1941)년에는 무려 두차례나 이 무덤에 대한 도굴을 감행하였다.

   그후 일제는 우리 인민들의 완강한 항거에 부닥치게 되자 이를 무마시키려고 동명왕릉이 보통무덤이라고 더욱 요란스레 떠들어댔다.

   이렇게 외곡된 력사적사실은 조국이 해방된후에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 사대주의자들, 민족허무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옳바로 밝혀지지 못했으며 력사학계에서도 왕릉의 주인공이 정말 동명왕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론의가 분분하였다.

   우리 고고학자들이 력사적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여러차례 발굴조사사업을 시도해보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버림받아왔고 외래침략자들, 특히 강도 일제에게 무참히 도굴당한 무덤이고보니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학계의 거듭되는 론쟁대상이던 동명왕릉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되였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학계의 관심밖으로 점점 밀려나게 되였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일찌기 아시아대륙에서 동서 6천리, 남북 4천리나 되는 광활한 령토와 천년의 오랜 력사, 군사대국의 막강한 위용을 떨쳐온 고구려사의 첫페지라고 할수 있는 동명왕릉의 진가를 밝히는것은 단순히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 문제이기전에 외래침략자들과 사대주의자, 민족허무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해온 우리 나라 력사를 바로잡는가 아니면 한 시기의 력사를 통채로 잃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포구역에 있는 무덤이 동명왕릉이 아니라 가짜무덤이라고 하는것은 사대주의적견해이다, 고구려는 강대한 나라인데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을수 없다고 하시면서 나라일이 바쁘신 속에서도 여러차례 이곳을 찾으시여 왕릉고증과 관련한 방향을 주시였다.

   그리고 주체63(1974)년 1월 23일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연구집단에 주체적립장에서 동명왕릉문제를 대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왕릉발굴조사사업을 전면적으로 폭넓게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국가적인 관심속에 동명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사업이 진행되였으며 발굴과정에 무덤에서 금, 은으로 장식한 여러개의 관못과 왕관을 장식했던 100여개의 금장식품들, 구슬과 머리빗 등 귀중한 유물들을 찾아냈다.

   그뿐아니라 오랜 세월 스며내린 돌물로 하여 보이지 않던 벽화까지 찾아내고 왕릉앞의 큰 절간터에서 《정릉》, 《릉사》라는 글을 새긴 기와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을 발굴함으로써 이 묘가 왕릉이 틀림없으며 앞의 절은 왕릉을 위해 지었다는것을 명백히 증명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동안 미해명으로 남아있던 동명왕과 동명왕릉고증문제를 빛나게 해결해주시였을뿐아니라 왕릉개건사업도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당시 왕릉앞에는 조선봉건왕조말기에 세운 짐승조각상과 문무관조각상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있었는데 봉건관료배들이 조상에 대한 성의가 없이 되는대로 만들었기때문에 어느것이나 초라하기 그지없고 미신적인 감이 많았다.

   동명왕릉표식비도 자그마한 돌로 만들고 문무관상은 씩씩하고 용감한 고구려사람답지 않게 난쟁이처럼 형상하였으며 돌말은 소인지 개인지도 모르게, 돌범은 삵이나 고양이만도 못하게 만들었던것이다.

   주체78(1989)년 4월초 어느날 또다시 동명왕릉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개건방향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고구려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하였는데 돌말이 고구려를 상징하는것만큼 지금 있는 초라한 말대신 크고 날파람있는 말을 세우고 돌범도 죽어가는 범이 아니라 조선의 용맹을 상징하는 범으로 크게 잘 만들데 대한 문제, 무덤앞에 있는 문무관상도 고구려 개국공신들의 기상이 반영되도록 다시 잘 만들데 대한 문제, 새로 세울 돌조각상들과 비례에 맞게 봉분을 본래것보다 더 크게 할데 대한 문제, 정릉사를 고구려시기의 고유한 절형식으로 복원하고 거기에 고구려의 유물전시관을 꾸릴데 대한 문제, 왕릉이 잘 보이도록 정릉사의 중심축을 바로잡을데 대한 문제, 왕릉주변에 큰 소나무들을 많이 심을데 대한 문제 등 동명왕릉개건방향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로부터 며칠후에는 력사학자들을 집무실로 부르시여 동명왕릉형성사판을 함께 보아주시면서 릉앞에 세울 문무관조각상들에 동명왕의 충신들로 이름을 달아주도록 하며 여러 짐승조각상들의 수자며 새로 세울 비문내용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 동명왕릉 총계획형성사판을 다시 보아주시고 명절날의 휴식일도, 추운 겨울날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개건현장에 자주 나오시여 범을 지금것보다 3배정도 크게 만들데 대한 문제, 릉문과 왕릉도 더 크게 만들고 동명왕릉을 고구려시조왕의 무덤답게 전반적으로 개축하여 다시 잘 꾸릴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는 고구려시조왕인 동명왕의 무덤을 더 잘 꾸리자고 한다고, 고적복구건설을 력사주의적원칙과 사실자료에 근거하여 품위있게 잘해야 한다고, 고구려무덤은 5세기까지는 돌무덤으로 만들고 그후부터 흙무덤을 만들었는데 동명왕릉은 5세기에 평양으로 옮기면서 만든것이므로 무덤기단을 돌로 쌓고 봉토는 흙으로 하되 왕릉기단 한면의 길이를 35메터로 하는것이 제일 좋겠다고 그 길이까지 밝혀주시였다. 그리고 정릉사가 왕릉앞 도로를 내는데 지장으로 된다는것을 아시고는 동명왕릉은 후세에 물려줄 력사유적인데 한점의 손색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정릉사를 동쪽벌판에 통채로 옮기도록 하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하고 정력적인 지도에 의하여 공사를 시작한지 3년만인 주체82(1993)년 5월 16일 동명왕릉준공식을 하게 되였다.

   현지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족하신 시선으로 왕릉을 둘러보시면서 왕릉을 크게 잘 만들었다고, 왕릉이 요란하다고, 왕릉주변을 잘 정리하니 보기 좋다고 거듭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왕릉개건비문도 잘 지었고 비문을 사람들이 다 읽어 볼수 있게 새기기도 잘 새겼다고, 기념비높이도 알맞춤하다고, 왕릉문이 그전에는 작았는데 이번에 크게 만들어놓으니 보기도 좋고 위엄이 있어보이고 왕릉문의 단청도 잘되였다고, 왕릉앞좌우에 4명의 문관과 4명의 무관조각상을 세워 놓았는데 크지도 않고 사람수가 많지도 않아 보기 좋다고 시종 만족하신 미소를 지으시고 학자들과 건축가들, 건설자들을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아래 외래침략자들과 어용사가들,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외곡되여 세월과 더불어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던 고구려시기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는 천수백여년이 지난 우리 시대에 와서 비로소 그 참다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였다.